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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벌새’는 2019년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199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기를 섬세하고 진실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단순히 사춘기 소녀의 일상을 다룬 드라마를 넘어, 당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환점과 구조적 불안 속에서 한 개인이 느끼는 감정과 변화를 깊이 있게 포착해 냈습니다. 주인공 은희의 시선을 통해 가족, 학교, 친구, 그리고 사회 속에서의 소외와 갈증,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며,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감정의 기록’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벌새는 국내는 물론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단 한 편의 영화가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증명한 예로 꼽힙니다.

영화 벌새 줄거리: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작게 날갯짓하는 은희의 성장

‘벌새’는 중학교 2학년생 은희(박지후 분)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1994년, 서울 성수동이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은희는 평범하지만 동시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갑니다. 가족 안에서 그녀는 늘 소외된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어머니는 무관심하며, 오빠는 은희를 괴롭히는 가해자에 가깝습니다. 학교에서는 친구와의 갈등, 연인과의 엇갈림 속에서 외로움을 겪으며, 병원에서는 갑작스레 발견된 종양으로 인한 불안함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런 그녀의 삶에 조용히 스며든 존재가 바로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입니다.

영지는 은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해 주는 몇 안 되는 어른입니다. 은희는 영지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존중받는 존재’ 임을 느끼고, 점차 자신에 대해 성찰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사춘기 소녀의 내면 풍경으로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사건은 크지 않지만, 은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감정의 경험입니다. 영화 속에서 은희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작고 조용한 날갯짓을 반복하며, 그것은 마치 벌새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 중반, 성수대교 붕괴라는 실제 역사적 사건이 등장하며 영화는 사회적 층위를 확장합니다. 구조적 불안과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은희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고요한 중심을 찾으려 애씁니다. 가족과 사회, 제도와 규범 속에서 점점 조용히 반항하며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단순한 성장 스토리를 넘어 세상과의 화해와 자기 발견이라는 깊은 주제를 내포합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은희의 작은 변화에 집중하며, 관객에게 일상의 조각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사려 깊게 전합니다.

주인공탐색: 은희, 존재를 갈망하는 소녀의 섬세한 초상

‘벌새’의 중심에는 단연 은희가 있습니다. 박지후 배우가 연기한 은희는 명백한 사건보다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깊이로 이야기의 중심을 이끕니다. 그녀는 우리가 흔히 ‘사춘기’라 부르는 시기의 전형성과 동시에, 누구에게나 있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결을 상징합니다. 은희는 언제나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가족에게는 말없이 방치되고, 친구에게는 종종 배신당하며, 사회에서는 자신의 감정이 그저 ‘지나가는 소란’처럼 치부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늘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자신만의 감정을 찾고 확인하려는 여정을 이어갑니다.

은희의 존재는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김보라 감독은 은희를 통해 사회의 주변부에 놓인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갈증을 세밀하게 조명합니다. 특히 은희의 감정 변화는 누군가에게는 미세한 움직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은희 개인에게는 삶 전체를 뒤흔드는 경험입니다. 예를 들어, 한문 선생님 영지와의 만남은 은희에게 단지 지식을 주는 존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영지는 처음으로 은희를 하나의 주체로 존중해 준 어른이며, 이 경험은 은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배우 박지후는 은희라는 인물을 과장 없이, 현실적인 디테일로 완성합니다. 그녀는 말보다 눈빛, 행동보다 침묵으로 은희의 내면을 전달하며, 관객이 감정을 ‘이해’하기보다는 ‘느끼게’ 만듭니다. 이는 벌새의 정서적 밀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은희는 혼란스럽고 아픈 감정들을 오롯이 통과하며, 점차 세상과 자신의 감정을 조율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결국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무심한 말들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작게 날갯짓을 이어가는 존재로 남습니다. 은희의 초상은 단지 한 시절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지나온 존재 확인의 서사이자, 아직도 그 답을 찾아가는 이들을 위한 조용한 위로입니다.

국내외반응: 한국 영화의 새로운 파동, 세계를 움직이다

‘벌새’는 국내 개봉 전부터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트라이베카 영화제, 시드니 영화제, 홍콩 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60여 개 영화제에 초청되며 한국 독립영화계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비평가들과 심사위원들은 ‘감정의 섬세한 묘사’, ‘여성 서사의 진정성’, ‘시선의 일관성과 용기’ 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국내에서는 개봉 초기 흥행 면에서는 다소 조용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장기 상영에 성공하며 약 14만 명의 관객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독립예술영화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성과이며, 상영 이후에도 온라인 스트리밍과 VOD 플랫폼을 통해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벌새’를 단지 성장영화로 보지 않고, 각자의 감정과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거울로 인식하며 오랜 여운을 남겼습니다. 특히 중학생, 고등학생 관객층뿐만 아니라 30~50대 여성 관객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대 간 감정적 공명을 만들어낸 영화로 평가받았습니다.

영화계 내부에서도 ‘벌새’는 새로운 여성 감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김보라 감독은 단 한 편의 장편으로 국내외 영화계를 강타했으며, 한국 여성 서사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보여주는 대표 감독으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박지후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글로벌 플랫폼에서도 활약하며 한국 청춘 배우의 대표 주자로 성장했습니다. ‘벌새’는 독립영화의 가능성을 넘어, 한국 영화가 감정과 서사로도 세계와 소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로 남았습니다.

‘벌새’는 화려한 기교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한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깊고, 복잡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작품입니다. 김보라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박지후의 깊은 연기는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울리며,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이해받는 감정’을 남겼습니다. 이 영화는 단지 관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며,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는 ‘감정의 파동’으로 기능합니다.

‘벌새’는 결국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소녀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 이 영화는 화려한 극적 장치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은희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소외된 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도 누군가에게 벌새였을지 모른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감정을 조용히 휘감는 영화이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든 간에, 그 마음의 중심을 되찾게 해주는 아름답고 따뜻한 작품입니다.